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한국의 역사 교양을 갖추어봅시다.
오늘은 과거 한국인의 노동 중 시장과 상인에 대해서 서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말로 '저자'라고 하는 장터는 물건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시장은 거래활동의 주체이자 상업민속을 전승한 상인, 즉 민중들의 물자교환과 문화교류가 이루어지는 곳이었고, 국가의 정책이나 명령을 고시하고, 새로운 정보나 유행이 확산되며 오락과 유흥이 벌어지고, 사회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던 곳입니다.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씨름, 줄다리기, 윷놀이, 남사당패놀이 등의 민속행사와 별신제 같은 굿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상업발달사에는 화폐가 시대별 발전상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곡물화폐나 가죽화폐, 그리고 자모전이라는 주화가 사용되었습니다. 삼한시대에는 국내상업뿐만 아니라 대외무역도 발달하였고, 철이 물품화폐로 사용되었습니다. 상거래가 이루어지기 위해 화폐, 장부와 셈기구, 도량형, 수송을 위한 동력 등이 필요했습니다. 개성상인(송상)들의 복식부기는 세계적으로 우수한 거래장부였습니다. 송상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복식부기를 사용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각국이 수도에 상설시장인 경시를 개설하였고, 지방에 향시를 열어 행상들이 활동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해동역사에 따르면 삼국통일 이후에 동시, 서시, 남시의 3개 시장 외에 수백 곳의 주읍에 시장이 있었습니다. 통일로 인해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해지고 교통이 원활해지면서 통일신라시대에는 민족자주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였고, 장보고의 무역활동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외무역도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장의 흐름은 비슷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중앙에는 국가가 지어 상인에게 대여하는 상설점포인 시전이 상설 운영되었습니다. 고려의 지방상업은 정기시장인 향시를 중심으로 번성했습니다. 전업적인 상인으로서 단체를 형성하는 향시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일반백성들은 쌀이나 포 등 물품화폐를 주로 사용했고, 송, 여진, 원, 왜나 아라비아 등 여러 외국 상인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며 건원중보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금속화폐가 등장했습니다. 이전과 달리 조선은 상업을 천시하는 풍토로 자유무역과 상업의 발달을 도모하지 못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상업조직은 서울의 거대한 규모의 상설점포인 시전과 선조 이후 시전 중에서도 규모가 큰 6개의 상점을 고른 육의전입니다. 그리고 지방도시의 상설점포와 객주 및 여각, 행상인 보부상, 어용상인인 공인 등이 있었습니다. 육의전에서는 신용을 복이라 하고, 단골손님을 복인이라 할 정도로 신용을 중요시했습니다. 조선의 대외무역은 명, 여진, 일본 등과 관무역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조선 전기의 최초의 지폐인 저화를 비롯해 조선통보의 유통을 추진하였으나 화폐는 널리 통용되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지방은 15세기 말부터 10일마다 열리던 시장이 17세기 후반에 5일장으로 바뀌면서 상업이 성행했습니다. 5일장은 조선시대 사회경제사의 상징이자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풍속이어서 2006년 100대 민족문화상징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 우시장, 약령시장, 곡물시장, 죽물시장 등의 특수시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5일장은 경제발전에 따른 도시화와 이농현상으로 현재는 수백곳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상인은 좌상과 행상으로 나뉘고, 행상은 육상과 선상이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전국적인 상인 집단으로는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 평양의 유상, 동래의 내상, 함흥, 북청, 원산 등지의 북상 등이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초에는 육상과 선상의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화폐경제도 발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시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던 장돌뱅이 가운데 보부상은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며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교환경제를 매개하는 전문적인 상인이었습니다. 보부상은 보상과 부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보상은 방물이나 세공품 같은 것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는 봇짐장수였습니다. 부상은 생활용품을 지게에 지고 다니며 파는 등짐장수를 말합니다. 보부상은 육의전과 더불어 조선상업사의 대표적인 존재였고, 19세기 이후에는 특정 물건을 독점하거나 시장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보부상의 조직력은 정치에 이용되거나 국난 때에 위기극복의 수단으로 쓰일만큼 막강했습니다.
보부상은 국가의 보호 아래 육성되는 대신 유사시에 국가를 위해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군수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였고, 정조가 화성을 축조할 때나 병인양요 시 강화도로 군량미를 운반할 때 공을 세웠고, 동학농민전쟁 때는 관군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일병합 이후 일제가 이 애국적인 상업단체의 말살을 획책함으로 전국의 보부상단은 거의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조선 후기의 대동법 실시 이후에 다양한 품목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도매상격인 공인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최초 상업자본가로, 서울과 지방에서 크게 활동함으로 화폐의 유통과 상업 및 수공업의 발달을 자극했습니다. 공인자본의 확대는 사회경제의 발전과정에서 공장제수공업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경제유통을 원활히하여 국가산업발전에 공헌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경제 부흥책의 일환으로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는데, 백성들은 이를 엽전이라 불렀습니다. 고종 25년(1888)까지 200년 이상 지속된 상평통보의 유통은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도매상인인 동시에 대금업, 위탁판매업, 여관업 등을 겸하는 객주나 여각은 상권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18세기부터 각지에서 뛰어난 자금력과 우수한 조직망을 토대로 서울 근교에 근거지를 두며 서울로 진입하는 물품들을 사모아 장사를 하는 자유상인들인 사상들의 활약이 커졌고, 전국적으로 시장이 확대되어 갔습니다. 의정부나 송파, 한강연안의 용산이나 마포 등이 대표적인 사상의 거점이었습니다. 이들은 3대 상설시장의 소상인과 개성상인들과 연계하여 그동안 특권을 누리던 시전상인이나 공인들을 압박하면서 점차 서울의 상품유통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18세기 말 이러한 사상이 중심이 된 난전의 상업활동이 공식적으로 인정됨으로 봉건적 경제체제는 해체되었고, 근대적인 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시작되었습니다. 즉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 보부상의 활동, 전국적 시장망의 형성, 화폐유통의 보편화, 사상의 등장 등 상업이 크게 발달했고, 청 일본 등과의 관무역 이외에 사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이렇게 상업에 의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며 근대자본주의의 기운이 형성되었습니다. 한편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상설시장은 생긴 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재래시장과 더불어 신식시장이 생긴 것은 1920년대 이후입니다. 정기적으로 매일 열리는 대표적인 재래시장은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인데, 남대문 시장은 수산물이 많고, 한국전쟁 이후 각종 수입제품을 조달해주는 수입상품의 명소로서 우리의 소비 생활 스타일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동대문 시장에는 과일, 채소가 유명하고, 오늘날 동대문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패션상품들이 확산되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 중심지이자 패션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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